
개관 전부터 피드와 연관 검색어에 연일 오르내리던
연희동 기지재단 박서보 미술관 소식.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미술관이라는 오롯한 물리적 공간 안에서 그의 세계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다른 무엇보다 내 발길을 이끈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3층에 자리한 백색 묘법(Écriture) 전용 공간.
화백이 미술관 건축 완공을 고대하며 생전에 미리 구상하고
대작 제작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접한 뒤로,
쏟아지는 빛 속에 놓인 거대한 건축 같은 회화를 꼭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기지재단 박서보 미술관 개관전 관람 정보
- 위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24길 9-2 (기지재단)
- 전시명: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 전시 기간: 2026.08.21 ~ 2027.01.03
- 관람 시간: 화요일~일요일 11:00 ~ 18:00 (마지막 입장 17:30 / 매주 월요일, 설·추석 당일 휴관)
- 관람료: 성인 기준 5,000원 (현장 기준)
- 도슨트 해설: 평일 14:00 / 주말 및 공휴일 14:00, 16:00 (사전 예약 없이 현장 무료 참여 가능)
- 주차 팁: 지하 1층에 전용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나, 연희동 특유의 좁은 주택가 골목을 거쳐야 하므로 대형 차량은 천천히 서행하는 것이 좋다.

수직 동선으로 체감하는 '비움 그 충만'의 미학
미술관에 들어서면 관람 동선은 지하 2층에서 시작해 지상 2층, 그리고 지상 3층으로 수직 상승한다.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갈수록 캔버스 위의 다채로운 색채들이 점차 덜어지며
마지막 3층의 순수한 백색으로 수렴하는 구조다.
덜어내고 비워낼수록 오히려 정신적인 깊이는 단단하게 채워진다는
이번 전시의 부제, '비움 그 충만'이 층간 이동 동선에 물리적으로 그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SPACE 0 (지하 2층): 박서보와 흐엉 도딘의 정신적 교감
한국 단색화의 태두 박서보와 베트남 출신 프랑스 작가 흐엉 도딘(Huong Dodinh)의 작품이 한자리에 놓여 있다.
서로 다른 국적과 기법을 지닌 두 작가이지만,
캔버스 위에 수만 번의 붓질과 수행적인 노동을 얹어냈다는 점에서 기묘하리만치 닮아 있었다.
결이 다른 두 세계가 벽면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호흡을 맞추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SPACE 2 (지상 2층): 건축을 닮은 회화, 회화를 닮은 건축
이곳에 걸린 작품들은 단순한 평면 회화라기보다 단단한 건축적 입체감을 뿜어낸다.
캔버스 표면의 요철과 한지의 물성을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싶어
나도 모르게 자꾸만 허리를 숙이게 되었다.
작품을 감상하며 걷다 마주친 중정 정원에서 아이가 불쑥 외벽을 가리키며 신이 나 말했다.
"엄마, 저기 정원 벽이 방금 본 박서보 그림이랑 똑같아."
순간 감탄이 나왔다.
아이의 직관적인 눈썰미가 정확했다.
규칙적인 요철과 수직의 선을 살려낸 노출 콘크리트 외관 자체가
박서보 화백의 대표 연작인 에크리튀르(묘법)를 고스란히 오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이 건물이 되고, 건물이 다시 그림의 배경이 되는 유기적인 연결이었다.


SPACE 3 (지상 3층): 빛과 여백이 완성한 백색 묘법의 절정
마침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3층 문을 열었다.
빛과 공간을 극한으로 활용한 전시장 안에는
우리나라 조선 백자 달항아리의 담백한 유백색을 빼닮은 거대한 백색 묘법 대작이 놓여 있었다.
소음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전시실에서,
천창과 창가로 스며드는 자연 채광이 캔버스 요철 사이로 부드럽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가 서 있는 각도와 발걸음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의 음영과 결이 실시간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기교를 비워낸 자리에 들어찬 순백의 압도적인 아우라.
그 거대한 침묵 속에서 느껴지는 전율 덕분에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복잡했던 일상의 상념을 하얗게 비워내고,
그 빈자리에 예술이 건네는 단단한 사유를 채워 넣은 시간.
연희동 골목 끝자락에서 마주한 박서보 미술관의 백색 묘법은 오래도록 마음에 잔향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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