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력을 넘기다 덜컥 멈췄다. 9월도 벌써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야지, 봐야지 마음만 굴뚝같던 프리즈 하우스 서울 기획전 《숲·대지·초원》의 전시 일정을 다시 확인해 보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놓치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순간이라는 직감이 들자마자 서둘러 아침을 챙겨 먹고 집을 나섰다.
초가을 볕이 좋아 도로에는 주말 나들이 차량이 길게 늘어섰지만, 다행히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공간을 압도하는 유기적 생명력, 다나베 치쿤사이 4세의 세계
문이 열리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도심 한복판의 소음이 일시에 소거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프리즈 하우스 서울의 《숲·대지·초원》은 자연의 원초적인 물성과 순환을 예술적 조형미로 담아낸 전시다.
그 중심에는 세계적인 현대 죽공예 설치미술가 다나베 치쿤사이 4세(Tanabe Chikuunsai IV)의 거대한 설치 작품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 오사카 사카이 지역에서 4대째 전통 죽공예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단순한 공예를 넘어 대나무를 현대 공간 설치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거장이다.
작품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거대한 구조물이 정말 식물 줄기로만 엮인 것인가' 하는 경외감이었다.
- 못과 접착제가 없는 직조 구조: 작가는 설계 도면 없이 현장의 공간감과 공기의 흐름을 온몸으로 읽어내며 수천, 수만 가닥의 대나무 살을 오직 손으로 엮어 올린다.
- 호랑이 대나무(토라치쿠): 고치현에서만 자라는 특유의 무늬를 지닌 대나무는 빛을 받을 때마다 미묘한 명암을 드리우며 살아 움직이는 숲의 질감을 뿜어낸다.
- 해체와 재생의 순환: 전시가 끝나면 이 거대한 설치물은 다시 해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작업의 재료로 쓰인다. '숲'에서 출발해 '대지'를 거쳐 다시 '자연'으로 회귀하는 순환의 철학이 작품 구조 자체에 녹아 있다.
바닥에서부터 천장을 타고 흐르며 공간 전체를 유기체처럼 감싸 안은 대나무의 곡선은 마치 거대한 숨을 쉬는 뿌리 같기도 하고, 대지 위로 솟구치는 바람의 길 같기도 했다.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스스로 알아내고 싶어하고 만약 다른 각도로 작품을 이해했더라도 그것이 본인이 작품을 이해하고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만 12세 소녀가 벌써 알고 있다.
정답을 맞히는 데 익숙해진 어른보다, 예술 앞에서 훨씬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가 의도한 바를 맞히지 못해도 상관없고, 조금 다른 각도로 이해했더라도 그것 역시 자신이 작품을 경험하고 온몸으로 즐긴 방식이라는 것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답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자라며 어느덧 예술 앞에서도 '정답 찾기'에 길들여졌던 내 모습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아이의 시선은 자유로웠다.
대나무 곡선 아래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허공의 틈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엮임의 결을 따라 시선을 천천히 옮기며 조용히 자기만의 호흡으로 작품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정해진 감상의 공식은 없었다.
아이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아이만의 전시장이었다.




숲에서 돌아오며
마지막 날이라는 조바심으로 달려온 길이었지만, 전시장을 나설 때는 마음속에 깊고 푸른 여운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거대한 대나무 숲을 마주하며 자연의 영속성을 체감한 것도 큰 수확이었지만, 그보다 더 뭉클했던 것은 자신의 세계를 주체적으로 세워가는 열두 살 딸아이의 성장을 지켜본 순간이었다.
예술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지가 아니라, 각자의 시선으로 자신만의 숲을 짓는 과정이라는 것을 아이를 통해 다시 배운다.
전시의 마지막 날, 우리는 도심 속에서 저마다의 마음에 푸른 대나무 숲 한 줄기를 엮어 들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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